지지대비
소개
지지대비는 옛날 화성과 광주의 경계에 위치한 지지현의 산마루 위에 있는 비석이다.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순조 7년(1807) 화성 어사 신현(申絢, 1764~1827)의 건의로 세워졌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 현재 화성시 융릉)에 참배를 하러 갈 때, 아버지의 묘가 내려다보이는 데도 묘까지 가는 시간이 너무 더디게 느껴져 "왜 이리 더딘가"하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또, 참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으면 더 이상 아버지의 묘가 보이지 않아, 그리워하는 마음에 안타까워하며 이 고개에서 눈물을 흘리며 한참 지체하였다고 한다. 이에 임금의 행차가 늦어지는 곳이라 하여, 느릴 지(遲)자를 두 번 붙여 지지대라고 부른다고 전해진다.
비석은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56cm, 너비 56cm, 두께 33cm 크기의 비신이 있으며 위로는 집모양의 옥개석을 올렸다. 비석의 전면 위에는 ‘遲遲臺碑銘(지지대비명)’이라는 전액(篆額, 전서체로 쓴 비신 상단부의 명칭)을 화성유수 홍명호(洪明浩)가 쓰고, 비의 비문은 서영보(徐榮輔)가 짓고, 윤사국(尹師國)이 글씨를 썼다. 비석의 내용을 보면, 정조 임금이 현륭원을 화산에 옮기고 매년 정월에 배알하고 제사지내며 궁으로 돌아갈 때 차마 가지 못하고 이 지지현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오랫동안 머뭇거리는 까닭은 임금님의 사모하는 마음이 한시도 화성을 떠나지 않음에 있다. 이는 옛날 공자께서 노나라를 떠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더디고 더디구나, 나의 발길이여!”라고 하셨으니, 공자가 의식적으로 더디 걸으려한 것이 아니라, 더딘 걸음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우리 선왕의 더딘 걸음도 역시 사모의 마음 때문에 스스로 더디고 더디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기』에 말하기를, “효자의 뜻은 다시 들어오실 것 같이 하다.”고 하였으나 지성이라야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여기에 높이 솟은 비석 우리 임금님 뜻이니 사신은 머리 조아려 끝없는 뜻을 기록해 놓는다고 하였다.
주위로 지지대 각자(刻字)가 있는 축대와 하마비(下馬碑, 누구든지 이 앞을 지날 때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비석)가 남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