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원사 칠성각
소개
○ 영조대 봉원사의 중창과 원당 건립
영조대 봉원사의 왕실지원은 실록의 기록으로 확인되는데, 영조 31년 기사를 보면 의소묘(懿昭墓)의 원당(願堂)으로 봉원사가 언급되어 있다. ?영조실록?, 영조 31년(1775) 11월 20일예조에서 황해 감사(黃海監司)의 이문(移文)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수안군(遂安郡)은 두메의 피폐한 고을입니다. 12방(坊)의 화전(火田)이 각 궁방(宮房)의 절수(折受)409) 에 모두 들어가고, 다만 율계(栗界) 1방이 있어 약간의 화전세(火田稅)로 관용(官用)에 보충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의소묘(懿昭墓)의 원당(願堂)인 봉원사(奉元寺)의 위전(位田)을 본고을에 망정(望定)하였다고 합니다. 사위전(寺位田)을 특교(特敎)에 의하여 이미 용인(龍仁)의 땅을 획급하였으니, 지금 이중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수안군의 절수한 곳을 도로 본고을에 소속시키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의소묘는 영조의 장손이며 정조의 동복형인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의 묘이다. 의소세손은 화평옹주의 3년 상이 끝나는 달인 8월 27일에 태어났다. 이듬해 1751년(영조 27년) 5월 13일에는 왕세손으로 책봉되어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다음 해에 3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의 묘는 서대문 밖 안현(鞍峴)의 남쪽 기슭(현 서대문구 북아현동 중앙여자고등학교)에 만들어졌고, 사당은 영조의 잠저인 경복궁 서편 창의궁 자리(현재 종로구 통의동 일대)에 세워졌다. 고종때 대한제국 반포로 의소묘는 의령원(懿寧園)으로 격상되었고, 1949년에는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장하였다. 이장하기 이전 묘의 위치는 봉원사와 가까운 곳으로 의소세손의 죽음을 애틋하게 여긴 영조가 통의동 의소묘 사당과는 별개로 봉원사에 원당을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의소묘의 조영은 영조가 처음 봉원사에 땅을 하사하였다고 기록된 1748년보다는 조금 후대의 일로 의소묘 조성 이전에 이미 봉원사에 대한 왕실의 후원이 있었는데, 그 배경은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1748)의 죽음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평옹주는 1743년에 남양주 불암사 목조석가여래좌상 개금불사에 남편 박명원(朴明源, 1725~1790)과 함께 대시주자로 동참한 기록이 있어 생전에 불교계와 인연이 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영조가 총애하던 화평옹주는 1748년에 22세로 요절하였는데, 실록에 의하면 영조는 딸의 병이 위중하자 직접 옹주의 집을 방문해 임종을 지켜본 후 염습에 참여한 후 환궁하였고, ?영조실록?, 영조 24년(1748) 6월 24일
화평옹주의 장례를 국장(國葬)에 버금갈 정도로 성대하게 치러 분묘를 만드는 데 수개월이 걸렸다고 ?영조실록?, 영조 24년(1748) 8월 2일
한다. 영조가 봉원사 중창을 지원한 시기가 화평옹주의 장례가 치러진 시기임을 볼 때 봉원사에 대한 왕실의 후원은 화평옹주의 원당으로서 시작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