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국가유산:밀양_신계성_여표비

밀양 신계성 여표비

밀양 신계성 여표비
종목 문화유산자료 (2006년 01월 12일 지정)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시대
소유 평산신씨사부공파종중
관리 평산신씨사부공파종중
소재지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72

소개

(1) 비문의 주인공

신계성(申季誠 : 1499-1562). 자는 자함(子諴),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평산이다. 송당(松堂) 박영(朴英)의 문인이며,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매우 절친하였다. 남명과 함께 경상우도의 실천적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점필재가 태어난 고을에서 태어나고 자람으로써 자연히 사림파의 학문 자세를 지닌 독행(篤行) 군자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에도 배향되었고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에도 향사되었다.

(2) 비문의 성격

여표비는 어떤 인물을 기념하고 드러내기 위하여 그가 살던 마을에 세우는 비석이라는 뜻으로, 유허비와 유사하나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종류의 비석이라 할 것이다.

(3) 비문의 찬자(撰者)와 서자(書者)

비문을 지은이는 약봉(藥峰) 김극일(金克一)로, 1576년 이 비문을 지을 당시 밀양부사였으며, 함께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 출입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백형이다.

(4) 비석의 크기와 비각

비신은 사암이며 크기는 가로 80cm, 세로 187cm이고, 이수와 대석이 갖추어져 있다. 비각은 단층 목조맞배지붕 형식이며, 정면과 측면이 모두 1간이다.

(5) 비석의 조성 경위

송계 신계성의 여표비는 송계 몰후 14년 뒤인 1576년에 손영제(孫英濟)·장수정(蔣守貞)·이경옥(李慶沃) 등의 주도로 당시 밀양부사인 김극일의 글을 받아 처음 세웠던 것이다. 이 때 비문의 글씨를 쓴 이는 향인 박도생(朴道生)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비석이 파괴되어, 박수춘(朴壽春)의 주도로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지문(識文)을 받아 다시 세웠다.『내암집』에는 이 비석을 세웠다고 되어 있으나, 후손들은 이 비석을 세운일이 없다고 한다.

1634년에 밀양부사 이유달(李惟達)이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지문을 받아 중건하였다. 이 때의 글씨는 창원부사 오여벌(吳汝橃)이 썼고, 두전은 사간(司諫) 김세렴(金世濂)이 썼다.

1756년 화재로 비각이 소실되면서 비석이 크게 훼손되었다. 1765년에 8세손 신사일(申思一)이 향중의 사림(士林)과 부사(府使) 김인대(金仁大)의 협조를 얻어 새 빗돌을 마련하고 비각과 비석을 다시 중건 하였다. 지문(識文)은 예조판서 윤급(尹汲)이 찬술하고, 약봉의 여표비명 및 여헌의 중건 지문과 함께 윤급 자신이 글씨를 썼으며 두전은 지수재(知守齋) 유척기(兪拓基)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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