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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국가유산:대봉_양희지_묘

대봉 양희지 묘

대봉 양희지 묘
종목 시도기념물 (2021년 08월 26일 지정)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봉토묘
시대 조선시대
소유 중***
관리 중***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소개

양희지(大峰 楊熙止, 1439~1504)는 본관이 평안도 중화(中和)이고, 자는 가행(可行), 호는 대봉(大峰)이다. 1462년(세조 8) 진사시와 생원시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1474년(성종 5) 문과(文科)에 합격했다. 이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형조판서(刑曹判書),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역임했다.

그는 이종근(학성이씨 이예의 아들)의 딸과 결혼해서 당시 풍습대로 남귀여가(男歸女家, 남자가 여자 집에 장가가서 거처함)하여 울산사람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울산군 ‘우거(寓居)’조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다. 양희지는 1504년(연산군 10) 2월 서울에서 사망하였는데, 동 10월까지 울산으로 운구해서 장례했다.

비석은 묘소 혼유석(상석) 앞 오른쪽에 서 있다. 비문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후손인 경릉참봉 정규석(鄭奎錫)이 지었으며, 글씨는 비석의 전액(篆額)과 함께 학성이씨(鶴城人) 이근오(李覲吾, 1760~1834, 울산 최초 문과 급제자)가 썼다. 비문에 따르면, 원래의 비석은 임진왜란 중에 멸실되었고 현재 비석은 1830년에 그의 10세손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그러나 묘 주변의 석인상과 묘지의 상석, 비석을 제외한 지대석과 비수는 암석 표면의 풍화상태를 고려할 때 묘 조성시기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양희지는 중앙과 지방의 고위 관직을 역임한 울산사람으로, 그의 가계와 행적, 묘소의 조성 관리 과정을 통해 조선 초에서 중후반에 이르는 울산 지역사의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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