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기의 충신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선생의 묘소이다.
공민왕 9년(1360)에 문과에 장원급제 후 예문관검열·대사성 등의 여러 벼슬을 거쳤다. 고려 당시 풍속이 모든 상제(喪祭)에 불교의식을 숭상했는데, 『가례(家禮)』에 의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해 예속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힘썼다. 서울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했고 기강을 정비하였으며 의창(義倉)을 다시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져서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이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끝까지 고려 왕실을 지키려다가 공양왕 4년(1392)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생이 순절한 후 개성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태종 6년(1406)에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으로 이장할 때,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이장 행렬 앞의 명정(銘旌, 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에 떨어져 상여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중종 12년(1517)에 건립된 묘비에는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의 시호를 쓰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묘역 입구에는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김수증(金壽增)이 글을 쓰고 김수항(金壽恒)이 전액(篆額, 전서체로 쓴 비신 상단부의 명칭)을 썼는데 왕조와 시대를 뛰어넘은 선생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