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상산성 내 안국사 경내 남쪽 축대 아래에 있는 호국사비에는 인조21년(1643) 이조판서겸 대제학인 이식(李植)이 왕명으로 사고를 순찰하고, 정축란 이후 문란해진 사고의 관리와 성내의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왕에게 진상(秦上)하여 1645년 호국사비를 창건하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고종 35년(1898) 간행된 적성지(赤城誌) 고적조(古迹條)에 비문의 전문이 게재되어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비는 이면비(二面碑)로 전체 높이는 1.78m이다. 직사각형 모양을 한 비석의 받침돌로 사면에 안상(眼象)을 배치하고, 좌우에 구름모양의 무늬를 조각했으며, 중앙에는 4개의 여의두문(如意頭紋)을 조각하여 돌출시켰으며, 상두면은 복연(伏連)을 새겨서 장식하였다. 농대는 높이 27㎝, 정면폭 82㎝, 측면폭 47㎝이다.
농대 위의 비신(碑身)은 상단에 ‘적상산성호국사비(赤裳山城護國寺婢)’라는 두전(頭篆)이 각자되어 있고, 아래로 본문을 새겼는데, 높이 1m, 폭 59㎝, 두께 17㎝이다. 그 뒷면에는 ‘순치 2년 10월 일건(順治二年 十月 日建)’이라 새겼다. 비신 위에 올려놓은 이수(賂首)는 4면에 용트림을 조형한 반룡(蟠龍)을 조각해 놓았다. 이수의 높이는 51㎝, 폭 82㎝, 두께 37㎝이다.
비문은 적상산성 관계되는 기록들, 사고지 설치, 사고지 방비의 허술함, 호국사 창건 경위 등을 담고 있다. 특히 호국사 창건비용은 전라감사의 봉급에서 충당하고, 승장(僧將)이 사역(使役)을 맡았으며, 무주현감(茂朱縣監)이 물자의 조달과 감독을 맡았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호국사는 본래 적상산성 안에 있는 사고(史庫)의 수호를 위한 승병들의 숙소로 1910년 경술국치로 사고가 폐지될 때까지 나라의 국사(國事)를 보존한 호국의 도량이었는데, 1949년 여순사건의 병화(兵火)로 소실되는 불행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