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에 축조된 읍성이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으로 옮기기 전까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수원 지역 행정 중심지였다. 읍성은 지방의 부(府), 군(郡), 현(縣) 등 행정관서가 설치된 고을에 축조되어 유사시에 외적을 대비하는 한편, 행정적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둘레는 최대 1,320m이고, 성 안에는 두 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읍성 내부에 위치한 수원부 관아 규모는 모두 163.5칸 이상으로 넓지 않은 지역에 각종 건물이 밀집하여 건립되었고 관아 건물 주변에 연못지 5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789년에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수원부 읍치는 현재의 수원시 팔달산 아래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수원부 관아의 중심 건물들과 민가 등은 대부분 철거되었다.
1999년에 고읍성 성벽을 일부 발굴하였다. 그 결과 북쪽 성벽은 할석을 일부 이용하면서 판축법으로 축조하였고, 서쪽 성벽은 고토양층 위에 토석혼축기법으로 축조한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관아터로 추정되는 지점에서는 고토양층에서 조선시대 후기층까지 5개의 문화층이 형성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는데, 이 가운데 조선 시대 건물지 3기 등을 조사하고 그 아래 문화층에서 고려 시대의 규모가 큰 건물 기초 시설을 확인하였다. 조사 과정에서 통일 신라 시대~조선 시대 후기에 이르는 토기와 자기, 그리고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기와는 17~18세기의 것들이 많아 고읍성 폐기 시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