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조선 후기 문관으로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출사 권유에도 불구하고 석천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 박세당의 묘는 의령남씨(宜寧南氏), 광주정씨(光州鄭氏) 두 부인과 합장(合葬)된 단분(單墳)이다. 봉분은 4각형으로 호석(護石)을 둘렀는데 이러한 대형의 4각 호석은 조선 후기 사대부묘 석물 조성의 기술력이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봉분 앞에 석상과 향로석이 놓여 있으며, 석상의 받침으로 고석(鼓石, 북 형태의 돌)이 아닌 사각형 석재를 사용했는데 이 박세당 묘역의 여러 석상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봉분 앞쪽 좌우에 건립한 망주석은 18세기 작품으로 정밀하게 연마되어 현대에 제작한 것처럼 보인다.
봉분 옆의 묘표는 1731년에 건립되었으며, 개석방부(蓋石方趺; 지붕돌과 네모난 비석 받침) 형태이다. 특히 개석은 가옥의 지붕 형태가 아닌 규형개석(圭形蓋石; 윗면이 평평하고 양쪽 모서리가 깎인 단순한 형태의 지붕돌)이다. 이 규형개석은 김포에 있는 박세당의 아버지 박정의 신도비에서도 사용되어 있다. 묘표 뒷면에는 박세당이 미리 지어 놓은 글과 함께 제자 이덕수가 지은 글을 손자 박필기(朴弼基)가 앞면의 글씨와 함께 썼다. 이 묘표는 한국 전쟁 때 비신이 반파(半破)되어 1968년 다시 제작해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