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령 금란계안 ====== | {{ http://www.cha.go.kr/unisearch/images/tangible_cult_prop/2020052014430400.png?400|의령 금란계안 }} || | **종목** | 시도유형문화유산 (2018년 03월 27일 지정) | | **분류** | 기록유산 / 전적류 / 전적류 / 전적류 | | **시대** | 조선 후기 | | **소유** | 부산대학교 | | **관리** | 부산대학교도서관 | |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산대학로63번길 2 (장전동, 부산대학교) (부산대학교 도서관) | ===== 소개 ===== ○ ?의령 금란계안? 12책은 일부 내용의 탈락과 결권 1권이 있지만, 17세기 초기부터 20세기까지 지금의 의령군 부림면지역에서 시행된 동약을 기록한 동안의 필사 원본을 모아 엮은 선장본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다양한 종이 종류의 제작기술과 공급형태, 서체 등을 진단할 수 있는 원천자료로 서지학적 가치를 가진다. 특히 300여년 동안 해당 지역사회에 생활하면서 향촌사회의 운영을 주도한 조직체계 및 운영형태와 함께 해당 인물들의 실체, 인적 연계망, 거주 공간, 출신성분, 개명(改名)실태, 당대 역사인식, 그리고 주도층의 성씨집단 등 다양한 역사적인 사실을 밝힐 수 있는 핵심적인 원천자료이기도 하다. 특히 이 필사본은 현존하는 유일본이므로 희소성에서도 상징적 가치를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금란계는 1629년(崇禎2) 입산(立山, 설뫼)리 인근마을 유지 22명이 모여 마을 자치규정인 구휼과 함께 상부상조하는 향약과 같은 동안(洞案)을 만들어 서로 도우며 살자는 의미로 결정된 것으로 12책의 문서이며 제를 지내던 金蘭亭(금란정, 경산리)이 있고 매년 음력 11월15일이 계일이다. ○ 금란계의 참여 범위는 옛날의 부산면(富山面)인 지금의 부림면 경산리, 입산리, 단원리, 손오리, 대곡리, 여배리 등 이었고, 주도해 왔던 성씨는 탐진안, 철성이, 전의이, 인천이, 청주한씨 등과 본관을 알 수 없는 鄭씨 등이었으며, 양반층과 비양반층을 함께 입록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 금란계에 참여한 인물과 규약이 기록된 동안(洞案)은 1629년부터 시작되는데, 제1책의 입의(立議)에는 1629년 이전에 동약이 실시되고 있었는데 이 무렵 그것이 해이해 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동약 창건의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으로 황폐해진 이후 서로 도우며 살았다는 것으로 보아 임란이후 얼마 안 된 시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 지헌실기의 이약입의(里約立議)에는 입의는 지헌 안기종(止軒 安起宗, 1556-1633)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탐진안씨가 이를 주도해 나갔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이 동약도 과실상규와 혼인, 장례 때의 부조를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악행에 대한 벌칙을 상, 중, 하 등급으로 나누어 마을에서 추방하는 등의 벌을 내렸으며 1803년부터는 상호부조 면에서 관대(冠帶), 교자(轎子) 등의 기물을 비치해서 공동으로 이용하는 방식을 새롭게 취하고 있다. ○ 동안의 제작 시기는 제1권(1629년)을 시작으로 제13권(1971년)까지이며 1700년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3권은 분실되어 결본이다. ○ 제1권부터 7권까지는 동안이라고 되어있고 8권부터 금란계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어 다른 지역의 동안과 구분하기 위하여 부른 것으로 보인다. 금란계와 같이 금란계 收支簿 1책, 금란계 時到記 2책도 같이 보관되어 있다. 금란계 시도기에는 2008년까지 8명이 모여 회의한 기록이 있으며, 지수부에는 2016년까지의 기록이 남아있고, 현재까지도 몇 명은 가끔 모이고 있다. ○ 1940년에는 금란계의 동안 및 관련 문헌을 보관하고 모임장소도 확실히 하기 위하여 금란정을 창건하여 현존하고 있으며, 동약은 해방이후인 1969년까지 동안 참여자의 명단이 새로 만들어지고 추가되었다. {{tag>국가유산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