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으로 건너뛰기
마이여행로그
사용자 도구
등록
로그인
사이트 도구
검색
도구
문서 보기
이전 판
역링크
최근 바뀜
미디어 관리자
사이트맵
등록
로그인
>
최근 바뀜
미디어 관리자
사이트맵
추적:
•
영암_최원립장군_묘_출토복식_유물
•
제주도의와가_지정번호_본번_통계_제외
•
서울_구_천도교_중앙총부_본관_2022
•
양산_통도사_창녕포교당_목조석가여래좌상
•
염불사_목관음보살좌상_및_복장_일괄
•
회덕동춘선생고택_정침_가묘_별묘
•
함양_영원사_목조보살좌상_및_복장물_일괄
•
영주_금광리_까치구멍집
•
진주단목리담산고택소장관포시집
•
전_대구_동화사_비로암_삼층석탑_납석사리호
대한민국:국가유산:고려직제학양수생처열부이씨려
이 문서는 읽기 전용입니다. 원본을 볼 수는 있지만 바꿀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관리자에게 문의하세요.
====== 고려직제학양수생처열부이씨려 ====== | {{ http://www.cha.go.kr/unisearch/images/cultural_material/1661846.jpg?400|고려직제학양수생처열부이씨려 }} || | **종목** | 문화유산자료 (2000년 11월 17일 지정) | | **분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사우 | | **시대** | 조선 영조 50년(1774) | | **소유** | 남원양씨추원재종중 | | **관리** | 순창군 | | **소재지** |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 568 | ===== 소개 ===== 이 정려는 고려 때 직제학을 지낸 양수생의 처 이씨의 지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이씨 부인은 남편 양수생이 죽은 후, 당시의 풍습대로 개가를 하라는 부모의 청을 거절하고, 이곳 구미리로 내려와 살면서 아들 양은보를 키워 가문을 잇도록 하였다. 양은보의 후손 중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오게 된 것도 모두 이씨부인의 노력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씨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 부인의 행실을 알게 된 조선 세조는 1467년에 정려를 내려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비와 정려각은 이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조선 영조 50년(1774)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건물로 세웠다. 이 정려에 대해서는 1760년에 간행된 「옥천군지(玉川郡誌)」에 조선후기 성리학자 도암(陶庵) 이재(李縡)가 쓴 ‘열부이씨전(烈婦李氏傳)’이 수록되어 있으며, 정려비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얘기가 전한다. {{tag>국가유산 문화재}}
대한민국/국가유산/고려직제학양수생처열부이씨려.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4/02 04:48
저자
sh
문서 도구
문서 보기
이전 판
역링크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