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국가유산:청주_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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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청주 척화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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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종목** | 시도기념물 (1978년 10월 27일 지정) | | ||
| + | |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 | ||
| + | | **시대** | 조선 | | ||
| + | | **소유** | 청주시 | | ||
| + | | **관리** | 청주시 | | ||
| + | |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사로 117 (남문로2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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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소개 ===== | ||
| + | 척화비는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와 1871년(고종 8)의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온 백성에게 서양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우고자 1871년 4월부터 서울과 전국의 교통요지에 세운 비석이다. 청주 척화비도 이때에 세운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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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척화비는 원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석교동의 어느 집 앞 길가의 하수구 뚜껑으로 있던 것을 1976년 2월 29일에 발견되어 현재 위치에 옮겨 놓은 것이다. 2단의 받침돌을 쌓고 그 위에 비신을 세웠는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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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척화비는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에 청군淸軍이 개입해 대원군을 청나라에 납치해 가고 고종이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틈을 탄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었다. 청주 척화비도 이 때 철거당했는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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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비문의 상태는 1행의 첫 글자인 ‘양洋’자와 2행의 첫 글자인 ‘즉則’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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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척화비의 비문의 내용은 모두 3행으로, 1행과 2행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 則和 主和賣國]라고 새겨 있으며, 3행은 본문보다 작은 글씨로 “우리들 자손만대에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라고 기록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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