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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국가유산:청주_송상현_묘소_및_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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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국가유산:청주_송상현_묘소_및_신도비 [2025/04/02 04:52] – 제거됨 - 바깥 편집 (Unknown date) 127.0.0.1대한민국:국가유산:청주_송상현_묘소_및_신도비 [2025/04/02 04:52] (현재) – 만듦 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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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 송상현 묘소 및 신도비 ======
 +| {{ http://www.cha.go.kr/unisearch/images/monument/1649892.jpg?400|청주 송상현 묘소 및 신도비 }} ||
 +| **종목** | 시도기념물 (1984년 12월 31일 지정) |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봉토묘 | 
 +| **시대** | 조선 | 
 +| **소유** | 여*** |
 +| **관리** | 여*** |
 +|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 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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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개 =====
 +임진왜란 때 순국한 천곡 송상현(泉谷 宋象賢, 1551〜1592)의 묘소와 신도비이다. 본래 부산광역시 동래東萊에 있던 것을 1610년(광해군 2)에 지금 위치인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에 있는 충렬사忠烈祠의 뒷산으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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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상현은 본관이 여산礪山이고 호는 천곡,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고 20세에 진사가 되었다.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583년(선조 16)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예조·호조·공조의 정랑正郎이 되었다. 이듬해부터 두 차례에 걸쳐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591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고 왜적이 침입해 올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방비를 굳게 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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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4일 부산진성을 침범한 왜군이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서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고 하자, 동래부사인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하여 항전할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 뒤 적군이 동래성을 포위하여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당하자 조복朝服을 갖춰 입고 단정히 앉은 채 순국하였다. 왜장인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그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지내 주었다 한다. 이후 송상현은 이조판서·좌찬성에 추증되고, 부산의 충렬사·개성의 숭절사崇節祠·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및 충렬묘忠烈廟·고부의 정충사旌忠祠 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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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은 상석·문인석·망주석·자명등·묘비 등을 갖추고 있다. 송상현 신도비는 묘소로부터 약 250m 아래 진입로 옆에 있으며, 1659년(효종 10)에 세운 것이다. 신도비는 사각형 받침대 위에 비신을 세우고, 덮개돌을 얹은 형태이다. 비신의 규모는 90×280×26㎝이고 1980년에 보호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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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상현 신도비의 비문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짓고 동춘 송준길同春 宋浚吉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제목인 두전頭篆은 서곡 이정영西谷 李正英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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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g>국가유산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