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국가유산:진주_오방재_호정집_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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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국가유산:진주_오방재_호정집_목판 [2025/04/02 04:53] – 제거됨 - 바깥 편집 (Unknown date) 127.0.0.1 | 대한민국:국가유산:진주_오방재_호정집_목판 [2025/04/02 04:53] (현재) – 만듦 s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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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진주 오방재 호정집 목판 ====== | ||
| + | | {{ http:// | ||
| + | | **종목** | 문화유산자료 (2009년 12월 03일 지정) | | ||
| + | |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목판각류 | | ||
| + | | **시대** | 1847년 | | ||
| + | | **소유** | 진양하씨종친회 | | ||
| + | | **관리** | 경상국립대학교 | | ||
| + | |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대로 501 (가좌동, 경상대학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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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소개 ===== | ||
| + | 1. 책판 현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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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 책판의 분량 : 46매 86장 (6매 12장 결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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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序 文 : 2매 3장 (1844년 柳致明 所撰 序文, 李景在 所撰 序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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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世系圖 : 1매 2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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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目 錄 : 1매 2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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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太宗 敎書 및 正祖 賜祭文 : 1매 2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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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제1권 : 11매 21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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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제2권 : 10매 20장(4매 8장 결락 : 1ㆍ2ㆍ9ㆍ10ㆍ11ㆍ12ㆍ23ㆍ24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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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제3권 : 13매 23장(1매 2장 결락 : 15ㆍ16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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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부 록 : 4매 8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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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발 문 : 1매 1장 (1매 2장 결락 : 2ㆍ3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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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변무록 : 2매 4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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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 책판의 크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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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마구리를 포함한 전체 크기 : 가로 45cm 세로 30c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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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광곽의 크기 : 가로 31cm 세로 21.5c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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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목판의 두께 : 약 2c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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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 간행 경위와 그 시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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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 서발문 찬술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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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호정집』의 서문은 定齋 柳致明(1777-1861)과 李景在에 의해 찬술된 두 편이 있는데, 유치명의 서문이 앞에 위치해 있다. 유치명의 서문이 찬술된 시기는 ‘上之十年甲辰端陽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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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발문은 방후손 容窩 河晉賢(1776-1846)이 찬술한 것인데, 역시 찬술시기가 밝혀져 있지 않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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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 간행 경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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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방후손인 容窩 河晉賢이 찬술한 『浩亭集』 발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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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아, 후손이 없고 병란을 여러 차례 겪어서 남기신 문집이 흩어져 전해지지 않는다. 족인 鎭達 씨가 사방으로 수소문하고 널리 찾아다녀서 비로소 초고를 만들었다. 또 족인 涑이 빠진 부분을 채집하여 겨우 책자를 완성하였다. [噫嗣續零替 兵燹屢經 遺集散佚無傳 族人鎭達氏 旁搜博訪 肇爲草稿 又有族人涑 採緝闕漏 僅成冊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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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리고 책의 말미에 “정미(1847)년 3월에 오방재에서 간행하다. [丁未三月日梧坊齋開刊]”라는 간기가 남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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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발문과 간기를 종합해 보면, 河鎭達에 의해 호정 하륜의 유문이 일차로 수집되어 초고가 이루어졌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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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하진현은 송정 하수일의 주손으로 진주 사곡에 거주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남계 이갑룡의 문인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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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3. 입록 인물 : 浩亭 河崙(1347-14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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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자는 大臨, 호는 浩亭이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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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는 李穡·鄭夢周·李崇仁·權近 등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다. 그러나 곧 권근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변신을 하여 1393(태조 2)년 경기좌도 도관찰출척사가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鄭道傳과의 불화로 그다지 비중 있는 직책을 맡지 못했다. 1394년 첨서중추원사가 되었으나 부친상으로 사직했다. 1396년 예문춘추관학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명나라와의 表箋是非로 정도전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조선에서 명에 보낸 외교문서에 명나라를 모욕하는 언사가 있다고 하여 문서 작성자인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명나라 측의 강경한 요구에서 비롯되었는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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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에 당시 정도전 등에 의해 세자책봉에서 밀려나고 자신의 병력마저도 빼앗길 위기에 처한 李芳遠과 급속히 가까워져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적극 지지했다. 그 공으로 정종이 즉위한 후 定社功臣 1등으로 晉山君에 봉해졌다. 그해 대대적인 관직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정당문학이 되었으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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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해 태종이 즉위하자 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이어 領三司事로서 知貢擧가 되고 관제를 개혁했으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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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치사 후 왕명으로 함길도 선왕의 陵寢을 巡審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문에 능하고 陰陽·醫術·星經·地理 등에 조예가 깊었으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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