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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국가유산:제주목_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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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국가유산:제주목_관아 [2025/04/02 04:54] – 제거됨 - 바깥 편집 (Unknown date) 127.0.0.1대한민국:국가유산:제주목_관아 [2025/04/02 04:54] (현재) – 만듦 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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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목 관아 ======
 +| {{ http://www.cha.go.kr/unisearch/images/history_site/1628521.jpg?400|제주목 관아 }} ||
 +| **종목** | 사적 (1993년 03월 31일 지정) |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관아 | 
 +| **시대** |  | 
 +| **소유** | 제주특별자치도 등 |
 +| **관리** | 제주시 |
 +| **소재지** | 제주 제주시 삼도2동 43-40번지 외 | 
 +
 +===== 소개 =====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제주목 관아는 지금의 제주 관덕정(보물)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 주요 관아시설이 자리하였던 곳으로 탐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
 +관아시설은 1434년(세종 16) 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인 1435년에 골격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 때 집중적으로 훼철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
 +이에 제주시에서는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문화층과 함께 제주목 관아의 주요시설이었던 동헌·내아 건물터 등의 위치와 규모를 확인하였다. 
 +
 +1993년 3월 30일에 제주목 관아지 일대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초석·기단석 등을 토대로 하고,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와 『탐라방영총람(耽羅防營總攬)』 등 당의 문헌 및 중앙문화재위원·향토사학가·전문가 등의 고증과 자문을 거쳐 지난 2002년 12월 복원공사를 완료하여 제주 고유의 역사적 숨결을 전해주고 있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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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대문(外大門) : 제주목 관아 건물로 통하는 영문의 대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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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대문은 문헌에 ‘진해루(鎭海樓)’, ‘탐라포정사(耽羅布政司)’ 로 표기되어 있다. 관아의 관문으로 1435년 홍화각(弘化閣) 창건시에 건립했다고 전하며, 1699년 남지훈(南至薰) 목사가 개건했다고 한다. 2층 누각 건물로 종루(鐘樓)로도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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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희각(延曦閣) : 제주목사의 집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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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희각은 목사가 집무하던 곳으로 상아(上衙)의 동헌(東軒), 목사의 정아(正衙) 등으로 불리웠다. 상아라 한 것은 판관(判官)의 집무처인 이아(二衙)와 구분해 명명된 것이다. 이원조(李源祚) 목사의 『연희각기(延曦閣記)』에 의하면“연희각은 예전에 기문(記文)이 없어서 건치(建置) 연월일을 상세히 알 수가 없다. 현판도 누가 명명하고 누가 쓴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건물은 겹처마에 깊숙한 지붕으로 좌대(座臺) 위에 높게 지어져 있다. 그 이름을 연희(延曦)라고 한 것은 외신(外臣)이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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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화각(弘化閣) : 절제사의 영청으로 사용하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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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화각은 예전에 절제사가 사무를 보던 곳이다. 1435년(세종 17) 최해산(崔海山) 안무사가 창건한 뒤 1648년(인조 26)에 김여수(金汝水) 목사가 중수하였으며, 1713년(숙종 39)에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되어 별도로 정아(正衙)를 설치함에 따라 이 홍화각은 영리청(營吏廳)이 되었다. ‘홍화각’이라 명명한 것은 왕의 어진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또한 홍화각은 탐라고각(耽羅古閣)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관아건물 중에서 뛰어난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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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련당(友蓮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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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련당은 1526년(중종 21)에 이수동(李壽童) 목사가 성(城) 안에 우물이 없으면 적이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거나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구급하기 어렵다 하여, 못을 파고 물을 가두어 연꽃을 심은 뒤 그 곳에 세웠던 정자이며 연회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그 뒤 영조(英祖) 때에는 김정 목사가 다시 정자를 중수하고 못 가운데 석대(石臺)를 쌓아서 꽃과 대나무를 심고 향의실(享儀室)이라 개명하여 공물(貢物)을 봉진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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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주협당(瀛洲協堂) : 목사를 보좌하는 군관들이 근무하던 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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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협당은 원래 군관(軍官)들이 근무하던 관청이었다.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예전의 군관청(軍官廳)이 영(營)·목(牧) 소속으로 분리될 때 영군관청(營軍官廳)이 되었다. 군관의 수는 원래 15인이었으나 효종(孝宗) 초기에 이경억(李慶億) 어사가 조정에 건의하여 10인으로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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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귤림당(橘林堂) : 제주목사가 고즈넉한 여유를 만끽하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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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귤림당은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詩)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1743년(영조 19) 안경운(安慶運) 목사가 개건하였고, 1769년(영조 45)에 다시 중수한 뒤 건물이 노후(老朽)하여 이원조 목사가 1842년(헌종 8)에 다시 중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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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경루(望京樓) : 임금님의 은덕을 기리는 공간인 동시에 제주 앞바다로 침범하는 왜구를 감시하는 망루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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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경루는 북두성(北斗星)을 의지하여 임금님이 있는 서울을 바라보며 그 은덕(恩德)을 기리는 신지(信地)이며 중요한 제주목관아의 하나였다. 1556년(명종 11) 김수문(金秀文) 목사가 창건한 뒤 1668년(현종 9) 이인(李土寅 ) 목사가 개건하였고, 1806년(순조 6)에는 박종주(朴宗柱) 목사가 중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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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랑(回廊) :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복도의 성격을 지닌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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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랑은 정당(正堂)의 좌우(左右)에 있는 긴 집채를 말한다. 원래는 칸마다 벽체를 둘러 방으로 또는 다른 용도의 기능을 했을 것이나 지금은 개방형으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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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대문(中大門) : 관아내의 출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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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대문 동헌(東軒)으로 통하는 외대문과 내대문의 중간에 있었던 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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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제주목관아 → 제주목 관아)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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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g>국가유산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