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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국가유산:정몽주선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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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국가유산:정몽주선생묘 [2025/04/01 05:59] – 만듦 sh대한민국:국가유산:정몽주선생묘 [2025/04/02 04:47] (현재) – 만듦 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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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몽주선생묘 ======
 +| {{ http://www.cha.go.kr/unisearch/images/monument/1645933.jpg?400|정몽주선생묘 }} ||
 +| **종목** | 시도기념물 (1972년 05월 04일 지정) |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기타 | 
 +| **시대** | 조선시대 | 
 +| **소유** | 영*** |
 +| **관리** | 영*** |
 +|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산 3 | 
 +
 +===== 소개 =====
 +고려 말기의 충신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선생의 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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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민왕 9년(1360)에 문과에 장원급제 후 예문관검열·대사성 등의 여러 벼슬을 거쳤다. 고려 당시 풍속이 모든 상제(喪祭)에 불교의식을 숭상했는데, 『가례(家禮)』에 의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해 예속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힘썼다. 서울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했고 기강을 정비하였으며 의창(義倉)을 다시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져서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이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끝까지 고려 왕실을 지키려다가 공양왕 4년(1392)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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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생이 순절한 후 개성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태종 6년(1406)에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으로 이장할 때,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이장 행렬 앞의 명정(銘旌, 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에 떨어져 상여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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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종 12년(1517)에 건립된 묘비에는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의 시호를 쓰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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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입구에는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김수증(金壽增)이 글을 쓰고 김수항(金壽恒)이 전액(篆額, 전서체로 쓴 비신 상단부의 명칭)을 썼는데 왕조와 시대를 뛰어넘은 선생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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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g>국가유산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