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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국가유산:완도_묘당도_이충무공_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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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국가유산:완도_묘당도_이충무공_유적 [2025/04/02 04:53] – 제거됨 - 바깥 편집 (Unknown date) 127.0.0.1대한민국:국가유산:완도_묘당도_이충무공_유적 [2025/04/02 04:53] (현재) – 만듦 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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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
 +| {{ http://www.cha.go.kr/unisearch/images/history_site/1627055.jpg?400|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 ||
 +| **종목** | 사적 (1963년 01월 21일 지정) |
 +| **분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역사사건 / 역사사건 | 
 +| **시대** | 조선시대 | 
 +| **소유** | 사단법인이충무공유적 고금도충무사보존위원회 |
 +| **관리** | 완도군 |
 +| **소재지** | 전남 완도군 고금면 세동84번길 86-31 (덕동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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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개 =====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과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의 군사들이 힘을 합해 왜군을 물리쳤던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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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무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던 때에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여 여수를 중심으로 배를 만들고 군비를 늘리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포대첩, 노량해전, 당항포해전, 한산대첩 등 곳곳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대첩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죽은 후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올랐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선조 31년(1598)에 이순신이 약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을 쳤고, 그 해 7월에 명나라 장수 진린이 약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하였다. 가까이에 있던 이곳 묘당도에 진을 치면서 두 나라의 군사가 힘을 합하게 되었는데, 이후 7개월간 이곳은 조선과 명나라의 해군 본부가 되었다.
 +
 + 지금 이곳에는 이충무공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충무사가 있고, 보호하는 절의 의미를 띤 옥천사가 나란히 있다. 충무사는 진린이 꿈에 나타난 관운장을 제사지내어 장병들의 무사함을 기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하는 관왕묘에서 유래한다. 옥천사는 현종 7년(1666)에 처음 지어졌는데, 관왕묘를 보수공사하면서 그 옆에 수호와 제사를 맡게 하기 위해 암자 하나를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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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시대에 관왕상과 위패·각종 유물들이 바다에 던져졌고, 옥천사의 불상만이 가까운 백운사에 옮겨져 보관되었다. 광복 후에는 관왕묘가 있던 자리에 충무사를 짓고 이충무공을 모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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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b>※(묘당도이충무공유적 →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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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g>국가유산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