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
문서의 선택한 두 판 사이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 다음 판 | 이전 판 |
| 대한민국:국가유산:부산진성 [2025/04/01 06:00] – 만듦 sh | 대한민국:국가유산:부산진성 [2025/04/02 04:48] (현재) – 만듦 sh |
|---|
| | ====== 부산진성 ====== |
| | | {{ http://www.cha.go.kr/unisearch/images/monument/1644941.jpg?400|부산진성 }} || |
| | | **종목** | 시도기념물 (1972년 06월 26일 지정) | |
| |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
| | | **시대** | 조선시대 | |
| | | **소유** | 부산광역시 외 | |
| | | **관리** | 부산광역시 동구 | |
| | | **소재지** | 부산 동구 자성로 99 (범일동) | |
| | |
| | ===== 소개 ===== |
| | 부산진(釜山鎭)은 조선 태종 7년(1407) 낙동강의 동쪽지역인 경상좌도(慶尙左道) 수군의 사령부로서 휘하 11개의 수군진성과 함께 동남해안의 방어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당시 수군은 배를 타고 바다에서 근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성종 21년(1490) 병선의 정박처로서 수군과 물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둘레 2,026척(약 950m)의 부산진성(구 부산진성)을 증산(甑山) 아래에 쌓게 되었다. |
| | |
| | 선조 25년(1592)의 임진왜란(壬辰倭亂) 첫 전투 때 부산진의 지휘관인 첨사(僉使) 정발(鄭撥)을 비롯한 군사와 백성들이 끝까지 싸웠으나 마침내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 일본군 장수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부산진성을 허물고 증산 정상에 본성(本城)인 증산왜성(倭城)을 쌓았다. 또한 동남쪽 해안가에는 본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지성支城: 원래의 성 밖에 보조로 쌓은 성, 자성대왜성(子城臺倭城))을 쌓았다. |
| | |
| |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 40년(1607) 조선 수군은 자성대왜성으로 진영(鎭營)을 옮겨 부산진첨사영(釜山鎭僉使營)으로 사용하였다. |
| | |
| | 당시 부산진성의 규모는 둘레 1,791보 4척(약 2.4㎞)로 여첩 (女堞, 성벽 위 담장시설) 483타(垜)가 있었고, 동서남북에는 문루門樓: 성문 위에 세운 높은 집 또는 다락를 두었는데 각각 진동문(鎭東門), 금루관(金壘關), 진남문(鎭南門), 구장루(龜藏樓)라 불렀다. 그리고 성내 정상에는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 장수 만세덕(萬世德)을 추모하는 만공단(萬公壇)이 조성되었고, 서북쪽 외성(外城) 공간에는 객사인 공진관(拱辰館)과 부속건물, 동남쪽 내성(內城) 공간에는 관아(官衙)를 비롯한 부속건물이 있었다. |
| | |
| | 일제강점기 시가지 정비 계획에 따라 성을 철거하면서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는데, 1974년 부산진성 정화 공사로 동문인 진동문(鎭東門, 구 건춘문), 서문인 금루관, 장대(將臺)인 승가정((勝嘉亭, 구 진남대)이 복원되었다. 현재는 부산진성공원 내 당시 자성대(子城臺)라고 부르던 일본식 성벽과 장대(將臺)인 승가정((勝嘉亭), 그리고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의 장군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이 세운‘천만리영양천공비(千萬里潁陽千公碑)’가 남아있다. 동문 서쪽에는 고려 말 왜구의 토벌에 공을 세운 최영 장군을 기리는 비각碑閣: 비를 세우고 그 위를 덮어 지은 집이 보존되어 있다. |
| | |
| | 부산진성은 조선수군의 5백년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임진왜란 때 쌓은 왜성과 이후 왜성을 이용한 조선 후기 수군진성에 대한 연구 자료로서도 그 가치가 크다. |
| | |
| | {{tag>국가유산 문화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