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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국가유산:명성황후생가 [2025/04/02 04:54] – 제거됨 - 바깥 편집 (Unknown date) 127.0.0.1 | 대한민국:국가유산:명성황후생가 [2025/04/02 04:54] (현재) – 만듦 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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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명성황후생가 ====== |
| | | {{ http://www.cha.go.kr/unisearch/images/tangible_cult_prop/1637405.jpg?400|명성황후생가 }} || |
| | | **종목** | 시도유형문화유산 (1973년 07월 10일 지정) | |
| | | **분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탄생지 | |
| | | **시대** | 숙종23년 | |
| | | **소유** | 여주시 | |
| | | **관리** | 여주시 | |
| | | **소재지** | 경기도 여주시 명성로 71 (능현동, 명성황후기념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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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소개 ===== |
| | 명성황후 생가는 고종의 황후로 개화기 국정에 참여하였으나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으로 시해된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는 철종 2년(1851) 경기도 여주에서 부친 민치록(閔致祿)과 모친 한창부부인 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8세 때 부친이 타계한 뒤, 어머니와 함께 서울의 감고당(感古堂)에 와서 살았다. 감고당은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집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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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성황후는 1866년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의 역할에 의해 16세 때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었다. 고종 즉위 이후 10년 동안 조선의 국정은 흥선대원군의 섭정 하에 운영되었으나, 고종이 성년이 되자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개화정책 추진과정에서 명성황후는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동학농민운동 등의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특히 동학농민운동 당시 일본이 무단으로 조선에 파병하여 경복궁을 침략, 조선 조정을 장악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궁중에 연금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명성황후는 러시아에 대한 접근을 통해 군주권 회복을 추구하였고, 러시아로 인해 조선의 보호국화가 좌절된 일제는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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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년(광무 1)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부여되었고, 고종의 황제 즉위와 대한제국 선포 직후 황후로 추존되었다. 그해 11월, 청량리의 홍릉(洪陵)에 장례를 치렀다가 1919년 고종의 장례 때 경기도 남양주 금곡의 홍릉에 합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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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집은 본래 숙종(1661~1720)의 비였던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의 부친이자 명성황후의 6대 조부인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의 묘지기용 작은집으로 숙종 13년(1687)에 처음 지어지고,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 1996년에 안채는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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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ag>국가유산 문화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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