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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국가유산:대봉_양희지_묘 [2025/04/02 04:51] – 제거됨 - 바깥 편집 (Unknown date) 127.0.0.1 | 대한민국:국가유산:대봉_양희지_묘 [2025/04/02 04:51] (현재) – 만듦 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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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봉 양희지 묘 ====== |
| | | {{ http://www.cha.go.kr/unisearch/images/monument/2021090407201000.jpg?400|대봉 양희지 묘 }} || |
| | | **종목** | 시도기념물 (2021년 08월 26일 지정) | |
| |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봉토묘 | |
| | | **시대** | 조선시대 | |
| | | **소유** | 중*** | |
| | | **관리** | 중*** | |
| | | **소재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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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소개 ===== |
| | 양희지(大峰 楊熙止, 1439~1504)는 본관이 평안도 중화(中和)이고, 자는 가행(可行), 호는 대봉(大峰)이다. 1462년(세조 8) 진사시와 생원시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1474년(성종 5) 문과(文科)에 합격했다. 이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형조판서(刑曹判書),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역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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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이종근(학성이씨 이예의 아들)의 딸과 결혼해서 당시 풍습대로 남귀여가(男歸女家, 남자가 여자 집에 장가가서 거처함)하여 울산사람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울산군 ‘우거(寓居)’조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다. 양희지는 1504년(연산군 10) 2월 서울에서 사망하였는데, 동 10월까지 울산으로 운구해서 장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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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석은 묘소 혼유석(상석) 앞 오른쪽에 서 있다. 비문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후손인 경릉참봉 정규석(鄭奎錫)이 지었으며, 글씨는 비석의 전액(篆額)과 함께 학성이씨(鶴城人) 이근오(李覲吾, 1760~1834, 울산 최초 문과 급제자)가 썼다. 비문에 따르면, 원래의 비석은 임진왜란 중에 멸실되었고 현재 비석은 1830년에 그의 10세손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그러나 묘 주변의 석인상과 묘지의 상석, 비석을 제외한 지대석과 비수는 암석 표면의 풍화상태를 고려할 때 묘 조성시기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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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희지는 중앙과 지방의 고위 관직을 역임한 울산사람으로, 그의 가계와 행적, 묘소의 조성 관리 과정을 통해 조선 초에서 중후반에 이르는 울산 지역사의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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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ag>국가유산 문화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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