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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국가유산:남은들_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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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은들 상여 ======
 +| {{ http://www.cha.go.kr/unisearch/images/imp_folklore_material/1633075.jpg?400|남은들 상여 }} ||
 +| **종목** | 국가민속문화유산 (1974년 03월 15일 지정) |
 +| **분류** | 유물 / 생활공예 / 목공예 / 가구류 | 
 +| **시대** | 1846년(추정) | 
 +| **소유** | 광천리마을 |
 +| **관리** | 국가유산청 국립고궁박물관 |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세종로 1-57번지 국립고궁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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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개 =====
 +남은들 상여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李球)의 시신을 장지까지 운반했던 상여로 행상, 영여, 온량거라고도 한다. 남은들 마을입구의 상여막에 보관되어 있는데 보통의 상여막에서 처럼 상여를 해체하여 보관하지 않고 조립된 그대로 관람하기 좋게 전시되어 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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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조성하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넓은 천을 펼쳤다. 몸체에는 봉황, 용무늬 등이 새겨지고 색색의 띠와 술을 늘어뜨려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데 망자의 명복을 빌고, 슬픔을 덜어주려는 의미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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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하는 말에 의하면 남연군은 순조 22년(1822)에 죽었는데 당시의 가야사 터(현재, 예산군 상가리에 있는 보덕사터)가 왕손을 낳게 하는 명당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흥선대원군이 헌종 6년(1840)에 가야사를 불태우고 아버지의 묘를 이장했다고 한다. 이장을 하고 난 그 다음 해에 둘째 아들 이재황(李載晃)-후일, 고종으로 즉위함-을 낳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상여의 제작은 1840년과 고종의 탄생년인 1852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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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상여는 그 자체의 가치보다도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상여라는 점에서 유물로서 가치가 있으며, 각 부의 조각수법도 당시의 조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다른 상여에 비하여 어느 정도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크다. 또한 대원군이 권세를 누리기 전에 제작된 것으로,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에 비해 소박한 모습이지만 왕실 상여의 제작을 담당하던 ‘귀후서(歸厚署)’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숙종 대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인 대여(大輿)의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청풍부원군 상여’와 비교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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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g>국가유산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