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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국가유산:남양주_광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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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국가유산:남양주_광릉 [2025/04/01 05:57] – 만듦 sh대한민국:국가유산:남양주_광릉 [2025/04/02 04:53] (현재) – 만듦 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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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양주 광릉 ======
 +| {{ http://www.cha.go.kr/unisearch/images/history_site/1625564.jpg?400|남양주 광릉 }} ||
 +| **종목** | 사적 (1970년 05월 26일 지정) |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 
 +| **시대** | 조선 세조 14년(1469) | 
 +| **소유** | 국(국가유산청) |
 +| **관리** | 국가유산청 조선왕릉동부지구관리소 |
 +|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광릉수목원로 354 (진접읍, 광릉) | 
 +
 +===== 소개 =====
 +광릉은 조선 7대 대왕인 세조(재위 1455∼1468)와 부인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무덤이다.
 +
 +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형인 문종이 세상을 떠난 후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계유정란을 일으킨 후에 1455년에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세조는 군제 개편·집현전 폐지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토지제도 정비·서적간행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146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 정희왕후 윤씨는 조선시대 최초로 수렴청정을 시행하였다. 수렴청정은 나이 어린 임금을 대신해서 왕대비가 정치를 대신하는 것으로 당시 성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정사를 돌보게 된 것이다. 정희왕후는 성종14년(1483)에 세상을 떠났다.
 +
 + 왕의 유언에 따라서 무덤방은 돌방을 만드는 대신 석회다짐으로 막았고,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돌방과 병석을 없앰으로해서 백성의 고통과 국가에서 쓰는 돈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무덤 주위에는 난간석을 세우고 그 밖으로 문석인·무석인·상석·망주석·호석·양석을 세웠다.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겼는데 이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광릉 밖에 없으며, 글자로 난간석에 표시하거나 나중에는 24방위까지 새겨 넣게 된다.
 +
 + 무덤배치에 있어서도 최초의 동원이강의 형식이다. 지금까지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나란히 두고자 할 때는 고려 현릉·정릉 식의 쌍릉이나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인 영릉의 형식으로 왕과 왕비를 함께 묻는 방법을 취하였으나, 광릉은 두 언덕을 한 정자각으로 묶는 새로운 배치로 후세의 무덤제도에 영향을 끼쳤다.
 +
 + 세종의 구 영릉이 조선 전기 왕릉 제도를 총정리한 것이라 한다면, 광릉은 조선 전기 왕릉 제도의 일대변화를 이룬 조선 왕릉 제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tag>국가유산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