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국가유산:금오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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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국가유산:금오산성 [2025/04/02 04:52] – 제거됨 - 바깥 편집 (Unknown date) 127.0.0.1 | 대한민국:국가유산:금오산성 [2025/04/02 04:52] (현재) – s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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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금오산성 ====== | ||
| + | | {{ http:// | ||
| + | | **종목** | 시도기념물 (1986년 12월 11일 지정) | | ||
| + |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시설 | | ||
| + | | **시대** | 고려말~조선시대 | | ||
| + | | **소유** | 국유 | | ||
| + | | **관리** | 김천시 | | ||
| + | | **소재지** |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리 산 18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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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소개 ===== | ||
| + | 금오산성의 수축 연대는 문헌상으로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고려 말 왜구들의 침입이 내륙까지 빈번했고 인명 살상과 노략질이 심해지자 주민들이 천혜의 요새인 금오산으로 피난, 산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당시 고려 말 선산·안동·개령·성주 등지의 많은 주민들이 징발당하여 산성을 수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인 1410년(태종 10) 금오산성을 수축(修築)하였고 1413년에 개축(改築)이 이루어졌다. 이 무렵 성내에 3개의 못, 4개의 샘이 있었다. 군창이 있던 것으로 보아 상당한 규모로 수칙, 정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95년(선조 28) 비변사에서 금오산성 수축의 필요성을 상계(上啓)하였다. 즉 당시 조정에서는 금오산성에 지정학적 특색으로 인해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과 함께 큰 진(鎭)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두 산성은 동서로 마주 서서 낙동강(洛東江)의 험조를 끼고 바로 중로(中路)의 요충이 되니 반드시 지켜야 할 땅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배설(裵楔)에게 우의정겸하사도도체찰사(右議政兼下四道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의견을 들은 뒤 보수하도록 명하고 공사를 전담케 했다. 이원익은 당시 선산부사(善山府使) 김윤국(金潤國)이 금오산성 수축 임무를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진주목사로 있던 배설을 선산부사 겸 금오산성 별장(別將)으로 임명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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