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국가유산:계미동경소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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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계미동경소진첩 ====== | ||
| + | | {{ http:// | ||
| + | | **종목** | 시도유형문화유산 (2010년 06월 17일 지정) | | ||
| + | | **분류** | 유물 / 일반회화 / 기록화 / 계회도 | | ||
| + | | **시대** | | | ||
| + | | **소유** | (학)고려중앙학원 | | ||
| + | | **관리** | (학)고려중앙학원 | | ||
| +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1-16 고려대 중앙도서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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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소개 ===== | ||
| + | 1703년(숙종 29) 계미년(癸未年)에 태어난 7명의 동갑들이 만든 동경계첩(同庚契帖)이다. 화첩을 펼치면 오른쪽 면은 비어 있고 왼쪽 면에 참판 이익진(李翼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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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어서 이들이 69세이던 1771년(영조 47) 10월 상순에 유언술이 쓴 서문이 4면에 걸쳐 있다. 화면 우측 상단에 ‘참판이공휘익진(參判李公諱翼鎭)’이란 식으로 화상(畵像) 주인공의 관직과 성명을 썼는데 맨 마지막의 초상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렇지만 서문을 쓴 유언술도 1703년생이므로 맨 마지막 초상화를 그의 것으로 생각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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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언술의 서문에 의하면 15명의 동갑내기들이 43세가 되던 을축년(1745년)에 처음으로 동경첩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벼슬살이 등으로 세상일에 바쁘게 지내다보니 십 수 년이 흘러 7명이 세상을 뜨고 8명이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소상(小像)을 만들어 작첩(作帖)하기로 했는데 화첩이 완성되기도 전에 또 3명이 세상을 떠서 서문을 쓴 1771년 당시에는 다섯 명만이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이익진은 1773년까지도 「승정원일기」에서 이름을 찾을 수 있고, 한익모는 1772년 영의정에 올라 지중추부사 조영진, 유언술과 함께 그해 기로소에 들어가 기로당상이 되었다. 따라서 1771년 당시에 이익진, 한익모, 조영진, 유언술 등이 생존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만은 1765년 3월 30일에 사망했으므로 이 화첩은 그 이전부터 제작되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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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녹색의 무늬 없는 비단 표지에는 흰색 비단 위에 “계미동경소진첩(癸未同庚小眞帖)”이라는 표제를 썼다. 화면의 가장자리는 감색 비단으로 둘렀는데 18세기의 서화첩 장황 형식을 잘 보여준다. 표지를 포함한 장황은 개장의 흔적 없이 원래의 상태를 보여주며 그림도 바탕의 손상이나 채색의 변화 없이 보관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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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초상화는 녹색(이익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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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동경계회도는 기록에 비해 실제로 남아 있는 작품이 많지 않고, 알려진 17세기의 동경계회도는 화첩보다는 화축이 많고 모두 모임의 광경을 그린 것이서 비교가 된다. 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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